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8/24 [16:18]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8/24 [16:18]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이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통일 국가를 수립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세 나라의 국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분립·대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화와 언어에서도 상당한 이질감이 있었다.

삼국이 통일됨으로써 비로소 이질적인 요소들이 하나로 융합했다. 통일된 문화를 형성·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라의 통일은 고구려의 일부 영토를 상실한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도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매우 크다. 신라에 의해 처음으로 한반도의 통일된 통치 체제를 갖추게 된 계기가 됐다.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요동 지방은 당나라에 점령되었다. 고구려 동북 지역에는 발해가 건국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잘 계승하였다. 신라의 문화가 가장 후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문화의 계승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관점은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대두된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신라 경주 중심의 골품귀족은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의 영향으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사실을 자기만족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실은「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하여 9세기 이전에 쓰인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된다.『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도 신라계의 문벌귀족으로서 신라 삼국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수용했다.

반면 오늘날 북한의 역사 인식은 크게 다르다. 처음 북한학계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긍정론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1962년판 『조선통사』상권에서 매우 새로운 인식틀을 제시한다.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취급해야 할 당위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국토 남부의 통합으로 축소시켰다. 민족주의 사학계열의 부정론적인 인식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당시 북한학계는 통일의 한계성은 신라가 당나라를 동맹자로 여기고 연합함으로써 야기된 역사적 과오로 여겼다. 그래도 신라의 삼국 통일의 동기와 희망만큼은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660년 당나라는 신라 무열왕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기 시작한다. 백제는 결국 계백의 황산벌 결사 전투를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만다. 웅진으로 달아났던 의자왕은 결국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 항복했다. 당군은 의자왕을 비롯하여 백제인 수만 명을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두고 통치했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백제의 유민들이 신라와 당나라 군대에 맞서 부흥운동을 벌였으나 내부 분열로 성공하지 못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이것을 후에 웅진도독부와 7주로 개편한다.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과제를 앞두고 당의 이러한 도발적 행동을 묵인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이 고구려에 집중되면서 고구려의 입장은 더욱 곤란해졌다. 고구려는 남쪽으로는 신라군의 공격을, 북쪽으로는 당나라의 침공을 방어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설상가상으로 666년에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연개소문이 죽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오른 남생(男生)이 지방순시를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일부 귀족들이 동생 남건(男建)과 남산(男山)을 부추겨 권력을 차지하도록 했다. 결국 남생은 두 동생의 배척으로 평양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국내성으로 피신했다가 당에 투항하고 말았다.

또한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는 자기가 관할하던 12성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고구려 지배층 내에서 일어난 내분은 고구려의 국력을 급격하게 약화시켰고, 신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는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면서 결국 고구려 왕조도 막을 내렸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망한 후 설인귀(薛仁貴)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 삼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9개의 도독부(都督府)까지 설치하고 2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고구려 유민 역시 각지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은 궁모성(窮牟城)을 근거지로 세력을 규합하고, 왕자 안승(安勝)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당나라에 대항했다. 그러나 안승은 얼마 후에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에 정착하게 한 다음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그 유민을 다스리게 했다.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군과 연합하여 대당투쟁을 전개했다.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두 나라를 당의 영토로 편입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지배하려고 했다.

더구나 신라까지도 병합하려는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본래 신라 땅이던 비열성(比烈城:지금의 안변)이 한때 고구려의 땅이었다 하여 그곳을 안동도호부 관하에 넘기도록 강요했다.

또 신라의 한성도독(漢城都督)을 회유해 무기를 훔쳐내고 한성주를 당나라 영토로 편입하려 했다. 당나라의 침략 행동에 대해 신라는 실력으로 맞섰다. 먼저 신라는 이전부터 백제 내에서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진압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고구려 유민들의 대(對)당 투쟁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670년 3월에 설오유(薛烏儒)가 이끄는 신라군과 태대형(太大兄)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고구려 유민군이 연합해 압록강을 건너가 당군을 토벌하면서 본격적인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신라는 매소성과 기벌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드디어 676년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는 약 10년에 걸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물리침으로써 한반도 대부분을 영토로 하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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