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고향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7/29 [09:55]

갈 수 없는 고향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7/29 [09:55]
                               
  오래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4∼5학년쯤 아랫마을에 문둥병이 생겨 동네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났었다. 얼마 후 그가 같은 반 친구인 것을 알았고 그때의 충격은 매우 컸었다. 그 무렵 문둥이들이 두, 세 명이 떼거리로 동냥하러 다녔고 아녀자들이 혼자 있는 집에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문둥이들이 병을 고치려고 애들의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 났었다. 큰 길의 삼(麻)밭에 숨어있으면 잡힐까봐 혼자는 오가지 못했고, 여러 명이 뛰어다니며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 뒤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어느 날 남원역 이웃인 산성역으로 발령이 났었다. 남원이 가까워 역이 없었지만, 시내의 연탄공장이 이곳으로 옮기면서 석탄수송을 위해 역이 생겼다. 바로 옆이 그들만 사는 마을이어서 고민이 되었다. 날짜에 맞춰 부임을 했다. 첫날부터 돼지 똥, 닭똥 냄새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역겨웠고 저기압 때는 정말 고역이었다. 점차 날이 지나면서 면역력이 생기고 이곳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벽 5시면 교회 종소리와 함께 교회 나가 예배가 끝나면 일이 시작되어 밤늦께 까지 하신분도 있었다.
  교룡산성 밑이라 산성이란 지명이 되었으며 그늘지고 대부분 돌산이었다. 산을 개간하여 단감나무, 자두, 밤, 사과나무를 심었다. 밭을 일구어 각종 채소를 심어 남원 시내에 공급하였고, 달걀은 전라남도까지 공급할 정도였으며 날마다 장사꾼들이 줄을 서서 사 갔다. 날이 갈수록 그분들과 유대관계가 좋아 졌다.
  이곳 사람들은 정부에서 검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네 이장은 아무리 이상이 없다고는 하나 저기압일 때는 서로 조심하고, 맑은 날은 거리낌 없이 만나도 된다는 말을 하며 자기 집에 초청도 받았다. 내놓은 음식은 병에든 음료수나 비닐로 싸진 빵을 내놓아 서로 불편함을 덜어 주었다. 반가워서 악수를 하면 오므라진 손가락에 일에 찌들인 손바닥이 단단하고 갈라져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이점도 익숙해져 갔다.
  역을 갑자기 만들면서 통행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시내버스 승강장이 역 광장에 있어 정거장을 지나야 하니 이틀에 한 번씩동네 사람들을 보게 된다. 지나다닌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릴 때 친구가 혹시 이곳에 있지 않을까를……. 그 뒤부터 지나다닌 사람 중 남자는 은연중 살펴보았다.
  한 달쯤 지나 친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러 차례 지나다녔지만, 동행자가 있었고 어느 때 아는 체를 할까 망설이던 중 혼자 지날 때 아는 체를 했었다. “혹시 ○○ 아닌가. “ 하고 말을 걸었는데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나를 몰라보는 눈치여서 고향마을을 말하니 아는 체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부모님 소식을 물의니 돌아가셨고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살짝 눈물을 보였다.
 지금 살고 있는 형편을 물었더니 늦게 이곳에 들어와 자기의 노력으로 굶지 않고 살아간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들었다. 아마 그 사람은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것이다. 나도 지나서 생각하니 오히려 모른 척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었다. 내 생각만 하고, 그 사람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후회되었다. 그 후 드문드문 인사하고 지냈다. 혹시 나를 피해 다니지는 않았을까도 생각해 보았고 친구와 허물없는 사이로 이어지진 못했다.
  한번은 동사무소에서 주관하는 야유회에 초청을 받았다. 아마 마을별로 몇 사람씩 차출했던 모양이다. 관광버스로 목적지까지 구경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술도 한잔씩 하면서 노래를 불렀었다. 그 마을 이장이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를 어떻게 처량하게 부르던지 본인도 울먹이고 참석했던 모든 분들도 눈물을 보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을까도 생각하며 가엾고 짠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한 가지 이분들의 삶은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일반인들도 이분들과 같이 일한다면 어렵게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그분들을 본 받아야 할 점 이하나 둘이 아니었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탤런트 뺨치는 예쁜 아들, 딸들이 오고 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울이나 큰 도시에 집도사고 자식들은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본인들은 손가락질 받으며 고생했지만 자녀들이 잘 살고 있다면 뿌듯함에 더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까 미루어 생각해 보았다.
  1년 반 만에 이곳을 떠나면서 친구도 잊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괜히 친구를 아는 척하여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지 않았나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고 후회가 되었다. 아마 지금은 1세대는 죽었을 것이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동네를 이루고 살 것이다. 친구도 그분들과 같이 비록 일은 고될지 모르나 터주 대감쯤 되어 자식들의 행복을 위안삼고, 가지 못하나 고향을 그리며 살 것이다. 
 
/정병남 <전 철도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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