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한,일 학술토론대회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12/20 [10:51]

빗나간 한,일 학술토론대회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12/20 [10:51]

 

 

부안군이 주관한 ‘백제유민의 일본 이주와 정착’ 이란 주제로 한,일 국제학술토론회를 가졌다. 홍보부족인지 부안군민참석자는 손안에 꼽을 정도였으며, 대부분이 행정관료 들이었다. 필자가 199358()부안군애향운동본부 주최 ‘주류성 백강 최후결전장 한일학술토론회’에 참석을 계기로 ‘주류성 백강전투’ 연구를 한지 20여년이 되었다. 연전에 장장 20회에 걸쳐 본지와 부안지역신문에 ‘주류성,백강전투-부안설’논문을 연재한 적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일본의 노학자 다나카 도시야키(田中俊明)교수는 26년 전 그 때 학술대회에 참석한 분으로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다나카 명예교수에게 질문을 하였다. 백제를 일본에서는 구다라(くだら)라고 하는데 그 음운이 전혀 다른데 일본통인 김용운교수는 ‘큰 나라=그나라=구다라로 변형된 말이라는데? 옆에 있던 L교수와 같이 백마강의 ‘구드래 나루터’ 이름이 ‘구다라’로 변한 것 아니냐는 답변이다. 그렇다면 글자그대로 쪼개진 왜국(倭國)은 ‘작은 나라’라는 뜻인데, 백제는 해상왕국으로 여러 곳에 담로(擔虜)를 둔 큰나라 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느냐? 는 반문을 던졌다. 여기서 작은 나라든 큰 나라든 간에 문제는 3년간 백제부흥운동을 한 주류성,백강전투지 비정에 초점을 맞춰야 맞다. 왜에 있던 왕자 풍장(豊障)을 왕으로 옹립하여 3년간 부흥운동을 한 본거지였던 주류성(우금산성)과 백강전투에서 패한(663.9.7) ()왕은 고구려로 망명을 하였고, 나라 잃은 유민들은 남부여대(男負) 짐을 꾸려 다시는 못 올 백제 땅을 떠나 일본 규슈를 향 하였다. 그 이동 경로는 *부안-줄포-흥덕-고창-장성-진원-광산-남평-능주-보성-조양포(득량만)까지 장장 200리 길로 하루에 50리를 걸어 4일정이었다.(全榮來 著 -白村江에서 大野城)까지) 백제유민 보트피플 중 백제의 상당한 지식층이 일본으로 망명한 다음 해 일본 천지기(天智紀)4년에 물설고 낯 설은 이국땅에 정착한 달솔(達率) 귀실집사(鬼室集斯=복신(福信)아들로 추정)에게 소금하(小錦下)란 벼슬을 주고 백제난민 400여명에게 오오미(近江),간사키(神前)에 옮겨 전답을 주어 살게 하였다. 그해 여름 8월에는 달솔(達率) 답발춘초(春初)로 하여금 나가토(長門)에 성을 쌓게 하였고, 달솔 억례복류(憶礼福留),사비복부(四比福夫)를 쓰쿠시(筑紫)에 보내어 오오노(大野)성과 기성()을 쌓게 하여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또한 다음해 겨울에는 백제 남녀 2000여인을 아즈마국(일본)에 이주 시켰으며 천지기 6년에는 백제유민과 함께 대마도에 금전성(金田城))을 쌓았다. 천지기8년에는 좌평(佐平) 여자신(餘自信)700여인을 오오미국()으로 이주 시켰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주류성 함락(663.9.7) 직후 임존성주 지수신(遲受信)은 농성()하며 항복을 않자 6631021일 신라군의 공격실패로 114일 군대를 설리정(舌利停)으로 철수 시켰다. 그 후 당군은 흑치상지를 앞세워 임존성을 치게 하니 지수신(遲受信)은 임존성을 버리고 고구려 망명을 끝으로 백제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고 만다. 문무왕(文武王)은 ‘남방기정 회군북벌(南方己定 廻軍北伐)’이라 기록했는데, 남방은 부안주류성이고 북벌은 임존성으로 북벌을 못하고 회군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주류성이 남쪽(부안)에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라 할 수 있다.  필자가 2회에 걸쳐 규슈지방을 여행시, 그곳 양심적인 학자들은 자기네 선조가 백제의 도래인 이라며 일본서기에 주류성은 ‘복신(福信)이 칭병한 굴이 있으며, 산이 험하여 수성에 좋으나 침공이 어렵고, 논밭이 없어 농상(農桑)을 할 수 없는 곳으로 하룻밤거리인 피성(벽성=김제)에 잠시 도읍(662.2)했다가 적과 근접해 위협을 느낀 나머지 주류성으로 되돌아 왔다. 또한 김춘추가 진을 쳤다가 패전한 고사비성(고부)부근에 인접한 곳이 바로 부안 개암사 뒷산 주류성과 가까운 백강전투지로 동진강, 두포천이 구비조건과 개연성이 가장 높다. 지금까지도 일제식민지 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밑에서 수사보로 일한 이병도의 한산설을 깨지 못하고 있다. 이마니시(今西龍)도 주류성이 우금산성이라 했는데,1995년 충남 서천군과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의 한산 건지산성 발굴 결과 고려후기성으로 밝혀져(김영관 저: 백제부흥운동연구 P182) 이병도의 한산설은 그 명분을 잃어 충남 사학자들도 부안설을 인정하고 있다. 부안군은 바로 이점을 부각시켜야 했다. 4세기 초 근초고왕 때 백제의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박사가 일본에 건너가 아직기는 ‘오오진 태자(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아직기의 천거로 왕인(王仁)박사는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보급하고 가르쳐 아스카문화(飛鳥文化)의 초석이 된다. 백제 패망후 백제 지식인과 유민들이 도일하여 발전시킨 작은나라 왜국(倭國)의 국호를 버리고 비로소 일본(673)이라 부르는 새로운 문명국으로 탈바꿈 하게 한 공로자들이 백제 망명인들이다. 결론적으로 ‘주류성과 백강전투’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토론회를 열고 홍보하여 하루속히 부안지방이 ‘주류성과 백강전투지’로 비정되어 역사문화의 보고(寶庫)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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