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호남정맥 천황지맥(계룡분맥)의 남원 덕과면 동산(150.1m)

호암서원, 호암 시비공원, 진덕재를 품은 진주 소 씨 종산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4/10 [09:28]

금남호남정맥 천황지맥(계룡분맥)의 남원 덕과면 동산(150.1m)

호암서원, 호암 시비공원, 진덕재를 품은 진주 소 씨 종산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4/10 [09:28]

       

 

▲ 만동마을 주산 동산     ©

 

 <개요와 자연경관>
  동산은 호암서원, 호암 시비공원, 진덕재 등 유서 깊은 유적을 간직한 진주 소 씨 종산으로 400년 된 벚나무와 울창한 숲이 유구한 역사를 말해 준다. 동산을 품은 만동마을의 동쪽은 닭장형국의 장태봉, 남쪽은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닭 벼슬 형국의 계룡산이 지켜주고, 북동쪽에는 임금과 태바를 상징하는 만행산 천황봉과 작은 천황봉이 우뚝 솟아 있다.

 

▲ 만동마을 입구     ©

 
  만도리 만동 이학재 이장과 소재호 전북예총 회장의 고증에 의하면, 만동마을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팔공산은 초근목피시절 많은 산나물과 산짐승, 화목을 공급하면서 근대에 매사냥꾼이 생매를 가을에 포획한 산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만도리는 늦은 섬이라는 의미인데 외방에서는 섬으로 보였다. 소재호 회장의 아호도 고향 이름을 딴 만도晩島다.

 

▲ 만동마을서 본 천황봉     ©

 
 계룡산은 만도리에서 사매로 넘어가는 땅재 위에 솟은 산으로 삼동굿놀이에 등장하는 닭 벼슬 형국이다. 계룡산의 동쪽에 위치한 약산은 풍수지리상 지네형국으로 지네가 닭을 해친다허여 백중날 세 성 씨를 가진 어린아이로 하여금 삼동굿놀이의 지네 밟기를 한다.
 호암서원은 만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당으로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서李舒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심구령, 안성, 소연, 소산복, 이당 등 6현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다. 호암 시비공원은 만도리 만동마을 초입에 조선시대 선비 20인의 시를 쌈지공원 형태로서 시비석 20기를 세웠다. 진덕재는 조선시대인 1890년(고종 27) 진주 소 씨 가문의 소욱택이 마을 유지들과 함께 주도하여 설립한 서당이다.
  동산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전라북도 전도>, <남원시 행정지도>, <<한국 지명 총람>>, <<남원의 마을유래>>, <<남원지>> 등에는 동산에 대한 기록이 없다.
 

▲ 만동마을서 본 동산과 천황봉     ©

 


<산경山經과 수경水經>
  1769년경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우리전통지리서인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로 고찰해 본 동산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렇다.
  우리 민족정기 서린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전북 땅 무주를 지나 장수 영취산에서 분기된 금남호남정맥 팔공산에서 서쪽으로 갈려나온 산줄기가 마령치를 지나 백운산(갈미봉)에 닿는다. 백운산에서 북쪽은 성수지맥(성수산 줄기), 서쪽은 영대지맥(영대산 줄기), 남쪽은 천황지맥(천황산 줄기)으로 세 갈래를 친다.
  백운산에서 남진하며 개동산, 상서산, 동막골봉, 만행산 천황봉, 남대문치봉, 둔병치봉, 약산, 책여산, 갈치, 어깨재봉을 지나 책여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간 계룡분맥 줄기에 계룡산을 일으킨다. 그리고 장태봉 갈림길을 지나 만동마을 뒤에 동산을 일으킨다.
 동산의 물줄기는 괴양천이 율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의 지류인 오수천으로 흘러든다. 동산의 행정구역은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만동마을이다.

 

<지리적 위치>
 지리적으로 동산의 북쪽은 사계산에서 뻗어오는 성산과 성적산, 북동쪽은 임금을 상징하는 만행산 천황봉과 태자를 상징하는 작은 천황봉이 우뚝 솟아있다. 동쪽은 옥녀봉과 큰 연화산, 동남쪽은 천황지맥의 약산과 구리치봉 등이 에워싸고 있다. 남쪽은 닭벼슬 형상의 계룡산과 닭장형상의 장태봉이 지켜준다.
 
<주변문화와 인문지리>
 <<남원의 마을유래>>, <<한국 지명 총람>>, <<디지털남원문화대전>> 등으로 살펴 본 동산의 주변문화와 인문지리는 이렇다.
 본래 남원군 적과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 때 만적리와 도촌리, 작소리의 각 일부와 고절면의 다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만적과 도촌의 이름을 따서 만도리라 하였다. 만도리는 만동리와 도촌리를 행정리로 포함하고 있다.
 만동리는 소석지가 처음 터를 잡을 때 만적이라 하였으나 1555년(명종 10) 이성춘이 자포실에 살다가 이웃 산수동으로 이주한 후 만적과 산수동을 합쳐 만동이라 하였다.
 도촌리는 홍수가 나면 마을 서편이 냇물처럼 범람하여 높은 곳에서 보면 마치 바다의 섬처럼 보인다하여 섬촌이라 했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섬 도島를 쓰는 도촌으로 불렀다.
 만동리는 조선 전기인 1400년경 진주 소 씨 소석지가 처음 정착하였다. 도촌리는 1424년 이웃마을 만동으로 이사해 온 소석지의 둘째아들 소선이 분가하여 정착한 곳이다. 만도리는 팔공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에 둘러싸인 분지로 ‘아홉 구九’자 지형이다. 마을 앞에 있는 계룡산에는 송이버섯이 자생하고 있다.

 

<문화유적 및 명소>

 

▲ 호암서원     ©

 
 [호암서원]
 호암서원은 덕과면 만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당이다.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서李舒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심구령, 안성, 소연, 소산복, 이당 등 6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1789년(정조 13)에 건립되었다. 본래 다른 곳에 있던 서원을 1789년(정조 13)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호암서원으로 바꿨다.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으나, 1960년에 복원하였으며, 해마다 3월에 제사를 지낸다.

 

▲ 호암시비 설명하는 남원문화원 김현식 국장     ©

 

[호암 시비공원]
 만도리 만동마을 초입에 세워진 조선시대 선비 20인의 시를 쌈지공원 형태로서 시비석 20기를 세웠다. 남원관련 선인들의 詩를 모아 돌에 새겼다. 호암시비의 확대 및 새로운 지역문화공간으로서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진덕재眞德齋]
 조선시대인 1890년(고종 27) 진주 소 씨 가문의 소욱택이 마을 유지들과 함께 주도하여 설립한 서당이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초기까지 약 50년간 운영되었다. 남원도호부 적과방 만동마을에서 교육적으로 큰 요람의 역할을 해온 서당이다.

 

 

<산행안내>
 o 1코스 : 갈치(721번 도로)-(1.3)어깨재봉-(1.0)책여산-(2.4)계룡산-(1.5)장태봉 갈림길-동산-(0.8)호암 시비공원(7.0km, 3시간 20분)

 <교통 안내>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19번 도로)-갈치삼거리(721번 도로)-갈치-보절(14번 도로)-만도리 만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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