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묵청포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4/08/27 [07:15]

할머니의 묵청포

새만금일보 | 입력 : 2014/08/27 [07:15]


이 나이에도 할머니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쓸쓸해 질 때는 할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어려움이 닥쳐서 전전긍긍할 때도 할머니 생각이 먼저 앞을 선다. 나보다도 더 배운 것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닌 할머니,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지만 언제나 선생님이었고 만능 위안자이셨다.

할머니는 음식을 만드시는 것도 요즘 일류요리사 뺨을 쳤다. 바가지에 대강 대강 손을 넣어 주물럭거리는 반찬이였는데 입맛이 없으면 입맛이 돋았고 매끈거리는 보리밥도 할머니가 만든 바가지 반찬이면 꿀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의 손맛이 좋으셨던 것 같다.

손으로 못하시는 음식이 없었던 만능재주꾼 할머니 단골 메뉴는 ‘묵청포’였다. 겨울이 지나고 춘삼월이 다가오면 사지가 나른한 봄날은 무척이나 지루했다. 그 때마다 ‘묵청포’가 간식으로 등장했다. 물론 할머니 솜씨였다. 묵청포는 일명 탕평채(蕩平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음식은 같은 성격을 띤 봄날의 간식이라 하지만 제조방법이 조금씩 다른 데가 있다. 묵청포는 만들어진 녹두묵을 잘게 썰고 돼지고기. 미나리. 김을 섞어 초장으로 무쳐 봄날 저녁 사랑방에 내놓는 음식이다.
탕평채(蕩平菜)는 녹두를 하루 밤 동안 물에 불려 둔다. 불린 녹두의 껍질을 벗겨내고 맷돌에 간다. 그것을 고운체에 걸러 한동안 가라앉히면 녹말이 침전된다. 이 녹말에 물을 적당하게 붓고 솥에 넣어 끓인다. 이때 한 사람은 부뚜막에 앉아서 계속 저어주어야 굳지 않는다. 얼마동안 젓다 보면 죽처럼 된다. 이것을 그릇에 퍼서 굳게 하면 녹두묵이 된다.
야들야들하게 굳은 녹두묵을 덜어내 굵은 채로 썬다. 여기에 필수적 요소인 숙주는 머리부문과 꼬리부분을 떼고 뜨거운 물에 슬쩍 데쳐 물기를 뺀다. 그 다음에 미나리 또는 김. 소고기등을 다져서 참기름을 넣고 간장을 적당히 넣은 다음 식초로 무친다. 이것이 탕평채의 본색이다. 상큼하면서 개운한 맛의 녹두묵의 또 다른 맛이다. 이 맛의 출처는 갖가지의 우수한 재료를 골라 한 그릇에  넣고 조화(調和)를 이룬데서 비롯되었지만 할머니 손맛이 고루고루 미친 데서 그 일품의 맛이 나온다.

언제부터 탕평채를 춘 삼월 시식(時食)으로 했는지의 기록은 없으나 선조들은 이 음식을 즐겨 들으셨다. 이 음식으로 해서 탕평책(蕩平策) 이 나왔다는 설도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균관에 가면 탕평비를 볼 수 있는데, 조선 후기 영조가 자신의 탕평책을 중외에 표방하여 경계하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비다. 탕평이란 <상서(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제5조인 <황극설(皇極說)>의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탕탕(王道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평(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이른 바 인군(人君)의 정치에는 편사(偏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당쟁의 피해를 절감했던 나머지 탕평책의 전철이 되는 ‘당쟁피해’를 하교하게 이른다. 그러나 탕평정국의 영조바람은 뿌리박힌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하고 늘 정국은 충돌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각종 탕평시책을 내세워 정국을 위태롭게 잡아가면서 탕평책은 정조로 이어져갔다.

일어나면 꺼꾸러지고의 파당 속에서 나마 임금 즉 정부는 탕평책을 지켜 인재등용의 근간을 잡고자 했던 그들의 충정을 후세들에게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요즘에도 탕평책은 거론 되고 있다. 형식만 다를 뿐 파당은 오늘에도 건재하다. 영남과 호남이라는 뿌리 깊은 불연 속선의 바람이 잠재워지지 않고 있다. 새 정부 들어서도 탕평책은 거론 되었다. 그런데 인물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미운털이 박혀서 전북도는 계속해서 무 장관 지대다. 조상을 탓할 것인지, 자신을 탓할 것인지 중앙에 가서 기댈 언덕이 없다. 주막의 탁자나 탕탕 치면서 맨 날 탁배기 타령에 젖는 전라도사람들이 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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