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암 이삼만 이야기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7/25 [17:03]

창암 이삼만 이야기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7/25 [17:03]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영조46 – 1847.헌종13) 은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다.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蒼巖)이다. 전라북도 정읍 출생이다.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완산(完山)이라고도 호를 썼다.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는데, 글씨에 열중하여 포(布)를 누여가면서 연습했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글씨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탕진하였고, 병중에도 하루 천자씩 쓰면서“벼루 세 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하였다.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한 달씩 가르쳤다.

그의 글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연히 전주에 온 부산 상인의 장부를 쓰게 되었는데 그 상인이 귀향하여 감상가에게 보이게 된 것을 계기로 필명이 높아졌다고 한다. 하동 칠불암(七佛庵)의 편액과 전주판(全州板) 칠서(七書)도 그의 필적이다.

전주 제남정(濟南亭)의 액(額)을 썼는데 갑오경장 때 제남정은 소실되었으나 액은 내정(內庭)에 날아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오세창(吳世昌)은 “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健愈)하다.”고 평하였다. 특히,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하였다.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한편 전주 한벽루는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조선 후기 명필로 유명했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한벽루에 올랐을 때 부채장사가 잠을 자고 있자, 창암이 모든 부채에다 글을 써 놓았다. 부채장사가 잠을 깨 화를 냈다. 그래서 남문거리에 가서 팔아보라고 해 나가서 파니 불티나게 팔렸고 다시 돌아와 사례를 하려 했으나 거절했다는 이야기이다.

한벽당의 서쪽 발이산 자락에는 자만동과 옥류동이 있다. 자만동에는 조선왕조의 서기가 뭉친 곳으로 목조대왕이 태어난 자리임을 표시하는 이목대비가 있다. 바로 옆에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를 의미하는 자만동금표가 서있다. 옥류동에는 금제사당을 비롯하여 서당인 구강재와 월당 최 담 유허비가 있다. 이곳의 바로 뒤에는 창암 이삼만의 고택이 있던 자리이다. 창암은 이곳 바위 위에 글씨 연습을 하다 잘 써진 글씨는 직접 바위에 새겼다. 취리한중 건곤일월, 수풍(水風), 백화담, 연비어약, 옥류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 땅속에 매몰되거나 유실된 것도 있다. 한벽당 뒤쪽으로는 예전 전라선 열차가 지나던 터널이 남아 있다.

한벽당은 전주인들의 풍류와 문화가 서린 곳이다. 한벽당은 초의선사, 추사와 창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이곳을 지나가는 대목도 나온다. 한벽당 바로 밑 바위에는‘매화향기를 찾아 가는 작은 소로’라는 뜻을 가진 심매경(尋梅逕)이란 암각서가 있다.

한벽당은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으며 안에는 시인, 묵객들이 걸어놓은 현판들이 가득하다. 누정 안에는 한벽당의 풍광을 읊은 시판과 중건기 등이 빽빽이 걸려있다. 밖에는 명필 강암(剛庵) 송성룡이 한벽당 편액을 중후한 예서로 썼다. 바로 옆에는 달밤에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는 요월대가 있는데, 석전 황욱이 왼손 악필법으로 편액을 썼다. 아홉 살 먹은 김예산도 한벽당 편액을 썼다.

한벽당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승암산 기슭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이다. 옛 사람들은 한벽청연(寒碧晴烟)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한벽청연(寒碧晴烟)은‘한벽당에서 바라본 안개 모습’혹은‘한벽당에서 바라본 저녁연기 모습’을 말한다. 청연(晴烟)은 갤청(晴), 연기연(烟)으로‘아름다운 안개’혹은‘아름다운 연기’를 뜻한다.

그리고 연(烟)과 연(煙)은 같은 한자이며 모두‘연기연’으로‘화려하고 아름다움’혹은‘밥 짓는 연기’를 말할 때 쓴다. 청연(晴烟)은‘한벽당 앞 냇가에서 아침에 올라오는 안개 모습’을 말한다. 또는‘저녁 때 한벽당 인근 주택에서 밥을 지을 때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벽당(寒碧堂)은 조선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 담 선생(전주최씨 후손)이 조선 초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월당 선생 유허비에는‘월당루(月塘樓)’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며‘한벽당’이라고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한벽(寒碧)’이란 이름은 이곳이 옥처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 같다 하여 붙인 것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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