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가야사를 발굴하라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12/10 [21:33]

전북의 가야사를 발굴하라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12/10 [21:33]

전북지역 가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가야사 관련 문화재 조사와 연구 사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도 '가야사 연구와 복원사업'이 포함됐다. 전북 장수군 봉화산에서는 전북 지역의 가야 유적을 본격적으로 발굴·정비하겠다는 의지를 알리는 '전북 가야 선포식'이 열리기도 했다.

앞으로 남원시와 장수군 등 전북 동부권 7개 지역에 퍼져 있는 가야 유적을 발굴·정비하기로 했다. 선포식에서는 유적 발굴을 하늘에 알리는 제를 지내고 과거 봉수대가 있었던 터에 기념탑을 세우는 행사가 진행됐다.‘전북가야’유물은 1983년 88고속도로(현 광대고속도로) 건설 공사 때 남원 월산리 고총(오래된 무덤)에서 처음 나왔다.

지금까지 690여 곳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철제초두(긴 자루가 달리고 다리가 셋인 작은 솥)와 중국과의 독자적 외교 가능성을 시사하는 중국계 청자인 계수호(鷄首壺·닭머리 모양의 단지), 갑주(甲胄·갑옷과 투구)가 대표적이다. 산성과 고분, 제철, 봉수 등 4개 분야를 중심으로 가야문화를 종합 정비하고 있다.

가야시대 유적은 일대 7개 시군에 걸쳐 690개(고분 448, 제철 129, 봉수 68, 산성 45)가 분포한 사실을 확인했다. 전라북도는 오는 2019년부터 2027년까지 5,4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발굴 조사를 벌여 경남과 더불어 전북도 가야 문화의 중심지라는 것을 알린 뒤 세계유산 등재를 시도한다는 계획이다.

우리는 보통 삼국시대를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활동한 시기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라와 백제 사이 경상남도 부근에 엄연히 다른 나라인‘가야(伽倻)’가 무려 500년 넘게 존속하고 있었다.

사실 삼국시대라는 말도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말고도 수많은 나라들이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해의 외딴 섬인 울릉도에도 우산국이라 불리던 작은 나라가 있었다. 백제, 가야, 신라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들의 영토에 마한, 변한, 진한이라는 다른 나라들이 활동했다.

또한 강원도와 함경도에는 동예와 옥저가 있었고, 고구려의 북쪽에는 그들보다 더 오래된 나라인 부여가 600년 가까이 존속했다. 제주도도 조선 초기까지‘탐라’라는 왕국이었다. 많은 나라들이 활동한 시기라는 뜻인‘열국시대(列國時代)’가 더 어울리는 말이다.《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삼국시대라는 명칭을 고집한 것은 잘못이다.

가야의 역사는《삼국사기》나《삼국유사》가 나오기 전인 11세기 말, 고려에서 나온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가락국기》는 그 내용 중 일부만《삼국유사》에 실렸을 뿐, 대부분은 사라지고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가야의 역사를 알기 위해《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봐야 한다.

가야사, 특히 가야의 시조 전설은《삼국유사》에 더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철저한 유교식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에 신화나 전설들은 가급적 책에 넣지 않고 몽땅 빼 버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래 가야인들은 왕 없이 아홉 명의 추장인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이 각자 백성들을 다스렸다. 추장들의 이름 뒤에 붙는‘간(干)’이라는 단어가 주목된다.

나중에 가야를 흡수한 신라도‘각간(角干)’이라는 관직명을 사용했다. 그런데 간은 몽골-투르크 계통 유목민들의 군주인‘칸’의 발음과 흡사하다. 혹시 가야의 백성들은 멀리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들의 후손일지 모른다. 추장들의 이름 뒤에 모두 칸이라는 말을 달았으며, 그것을 한자로 옮긴 발음이‘간’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촌락 단위로 살고 있던 백성들 앞에 후한의 광무제 시절인 서기 42년, 북쪽에 있는 구지산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이 모여들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 상자가 내려왔다. 상자를 열어 보니 그 안에 6개의 황금알이 놓여 있었다.

그 상자를 아도간의 집에 놓았는데, 하루 뒤에 알을 깨고 여섯 명의 아이들이 나왔다. 그중 가장 맏이가 수로라는 이름을 받았고 나머지 다섯 아이들도 각각 마을의 촌장이 되었다. 그래서 수로를 포함한 여섯 형제들은 모두 6가야의 왕이 되었다.

또한 6년 후인 서기 48년에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와 혼인하고 왕후에 올랐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깨어져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옛날 멀리 인도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부인 경상남도로 와서 현지인과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신화나 전설에 가까워 믿기 힘들다.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가 가야의 현지인이 아닌, 멀리 외부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것을 신화적인 기법을 빌려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회에서는 외부에서 이주한 지배자를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고 신격화하는 일이 많았다. 가야 땅에 김수로와 함께 온 이방인 지배자들이 모두 6명이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가야의 6국은 지금의 고령에 있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고성의 소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등이다. 그중 수로왕은 금관가야를 다스렸다.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金海)의‘김’을 따서 김수로라 불리게 되었다.

수로왕이 통치한 금관가야는 서기 5세기 초 고구려의 침입으로 약화되기 전까지 가야 연맹체들의 맹주 역할을 했다. 금관가야가 약화되자 가야 연맹체의 맹주는 대가야로 바뀌었다. 가야는 여섯 개의 작은 나라들의 연맹 왕국이었다. 초기에는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대가야가 맹주 역할을 했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가야로 배를 타고 이주하여 수로왕과 결혼했다는《삼국유사》의 기록은 얼핏 믿기 힘들다. 그래서 허황옥의 이야기를 가리켜 허황된 전설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많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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