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의 지도자 장개석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2/17 [16:17]

국민당의 지도자 장개석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2/17 [16:17]



장개석(蔣介石.장제스.1887-1975)의 본명은 장중정(蔣中正)이다. 그는 1928~1949년 중국국민당 정부의 주석을 지냈고 1949년 이후에는 타이완의 국민정부 주석을 지냈다. 장제스는 해안에 인접한 저장 성(절강성.浙江省)의 비교적 유복한 상인·농민 가문에서 태어났다.

1913~1916년, 중국의 공화주의자들 및 기타 혁명가들과 합세하여 중국의 새 총통이며 후에 황제로 등극한 위안스카이에 대항하여 싸웠다. 1925년 이래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1926년 중국 북부의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싸워 중국 전역을 장악했다.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고 1946년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된 후 1949년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는 국민당 잔여부대를 이끌고 타이완(臺灣)으로 건너가서 국민당 지도자들과 함께 중화민국을 건국하고 장기간 통치했다.

그는 군관(軍官)이 되기 위하여 1906년 중국 북부에 있던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 입학했고 이어 1907~1911년 일본에 유학했다. 1909~1911년 일본 군대에 근무하면서 일본군의 스파르타식 규율을 숭상하고 따르게 되었다. 또한 도쿄(東京) 유학시절에 만난 젊은 동료들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조국 땅에서 이민족인 만주족을 몰아내자는 결의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공화주의 신봉자, 혁명가로 변모했다. 1911년 중국에 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돌아와 청조(淸朝) 정부를 전복시킨 산발적인 전투에 참가했다.

1913~1916년에는 중국의 공화주의자들 및 기타 혁명가들과 합세하여 중국의 새 총통이며 후에 황제로 등극한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 같은 공적인 활동에 뒤이어 장제스는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1916~1917년의 2년 동안 상하이(上海)에 살면서 부정한 금전거래와 관련 있는 비밀결사 청방(靑幇)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18년 국민당의 지도자 쑨원(孫文)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공적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쑨원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세력 기반을 넓혔다.

쑨원의 주요 목표는 위안스카이 체제의 붕괴와 함께 군벌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혁명가들은 청조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뒤 그것을 한족 출신의 군벌들에게 넘겨주었다. 군벌들을 물리치는 일에 혁명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쑨원이 소비에트식으로 국민당을 개편하기 시작한 직후인 1923년 장제스는 소련을 방문하여 소비에트의 제도와, 특히 적군(赤軍)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다. 4개월 뒤 중국으로 돌아와 광둥(廣東) 근처의 황푸(黃埔)에 소비에트식으로 세워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이에 따라 소련의 군사고문관들이 광둥에 많이 몰려들었다. 이당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어 1925년 쑨원이 죽자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공산주의자들과 국민당의 보수적 인사들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장제스는 황푸 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지원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쑨원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였고 공산주의자들의 이 같은 위협에 아주 적절하게 대처했다. 그는 강·온 양면작전을 번갈아 써가면서 소련의 지원을 잃지 않는 가운데 중국 공산당원들의 세력을 견제했다.

소련은 그를 지원했으나 1927년 그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서 몰아내고 공산당이 조직한 노동조합 등을 탄압하여 마침내 공산당과 갈라서게 되자, 그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한편 장제스는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1925년 이래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1926년 중국 북부의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대규모 북벌을 개시했다. 1928년 그의 군대가 수도인 베이징(北京)에 입성하면서 북벌은 끝났다. 그해 난징(南京)에 그를 정부 수반으로 하는 국민당 주도의 새 중앙정부가 세워졌다.

1930년 10월 그는 유수한 권문세도가이며 친(親)서방 세력인 쑹가(宋家)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쑹가의 막내딸인 메이링(美齡)은 그의 두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국민정부의 주석으로서 사회개혁 정책을 굳건하게 지지했다.

그러나 정책의 대부분은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았다.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각 지방의 군벌들을 진압했다기보다는 중립화시킨 것뿐이었다. 군벌들은 여전히 그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농촌의 요새로 퇴각하여 그들 나름의 정부와 군대를 조직한 공산당원들도 또 다른 위협이었다. 게다가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중국 본토를 침략할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일본과 전쟁을 치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공산당을 섬멸하기 전까지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많은 항의를 받았다. 특히 공산당에 대한 완전 섬멸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아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는 시안(西安) 사건으로 인하여 공산당 섬멸작전을 중단하고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 침략군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그 후 4년 동안 연합군이 가세하기 전까지 중국은 단독으로 일본과 교전했고, 소련을 뺀 연합국들은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중국은 4강대국의 하나로 승전국이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내부적으로 부패의 징조를 보였다.

1946년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되자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1949년 장제스는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게 되었고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는 국민당 잔여부대를 이끌고 타이완으로 건너간다.

1979년 미국은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과 전면적인 국교를 수립하기 위하여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그는 그때까지 생존하지 못했다. 1975년 그가 죽자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국민당 주석 및 타이완 정부 수반으로 그 뒤를 이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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