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남원 운봉의 장봉獐峰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1/30 [14:29]

백두대간 남원 운봉의 장봉獐峰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1/30 [14:29]
▲장동서 본 주지봉     ©새만금일보

 

 <개요와 자연경관>
  장봉은 황산의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운봉읍 장교리 장동마을의 주봉이다. <<남원의 지명유래>> 기록에 의하면 “장동은 예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서 노루골이라 했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노루 장獐을 쓰는 장동獐洞이 되었다”고 한다.

 

▲양지서 본 지리산 자락     © 새만금일보


  <<신운성지>>에는 “장봉은 운봉읍 장교리와 이백면 강기리의 경계에 있으며, 장동마을의 주봉이 된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 지명 총람>>에는 “장동, 장치(노루골)은 장다리(장교마을)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장유치獐乳峙는 장동에서 이백면 내기리로 넘어 가는 고개”로 나와 있다. 운봉읍 장교리의 문병태 씨 고증에 의하면 “예로부터 연동마을 앞은 연꽃형상이며, 남원에서 가장 살기 좋은 십승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에는 장봉의 이름의 표기는 없고, 백두대간 장치獐峙 아래에 산의 높이(565.3m)만 나와 있다. <전라북도 전도>, <남원시 전도>에는 장치만 표기되어 있고 <남원시 행정지도>에는 장동마을만 표기되어 있다.

 

▲장동 뒤에서 본 장봉     ©새만금일보

 

 <산경山經과 수경水經>
  1769년경 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전통지리서인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로 고찰해 본 장봉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렇다.
 백두대간의 거대한 산줄기가 백두산 백두봉을 출발하여 지리산 천왕봉까지 남으로 1,621.5km를 뻗어간다. 전북지역의 백두대간 산줄기는 민주지산 삼도봉에서 시작되어 대덕산, 삼봉산, 덕유산 향적봉 어깨, 육십령, 깃대봉을 지나 장수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금남호남정맥을 나뉘어 놓는다. 그리고 백운산, 월경산, 봉화산, 매봉, 시리봉, 무덤산, 고남산을 지나 여원치로 가기 전 장치 아래의 백두대간에 장봉을 일으킨다.
  장봉의 물줄기는 서쪽은 요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동쪽은 람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장교마을회관     ©새만금일보

 

 <주변문화와 인문지리>
  <<한국 지명 총람>>, <<남원의 마을유래>> 등으로 살펴본 장봉의 주변문화와 인문지리는 이렇다.
  장교리는 본래 운봉의 서면 지역으로 지형이 긴 다리와 같아 장다리 또는 장교리라 하였다. 무학대사가 지형을 살펴보니 고남산 줄기가 마을까지 뻗어 내린 모양이 마치 긴 교량을 가설한 듯 하여 장다리라 하였다. 그리고 장차 이 씨와 김 씨의 터가 될 것이라는 예언했다고 한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여원리, 장치리, 연동리 일부가 병합되어 장교리라 하고 남원군 운봉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운봉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운봉읍 장교리가 되었다.

 

▲양지마을회관     © 새만금일보


 장동마을은 예로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했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노루 장獐을 쓰는 장동이 되었다. 최초로 신 씨, 그 뒤로 고 씨가 터를 잡았으며 지금은 여러 성 씨가 살고 있다. 조선시대 여원女院이 있었던 연재(여원치)는 옛적에 남원시장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휴식처인 주막이 있었던 마을이다. 24번 국도가 지나고 합민산성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장교리는 삼국시대부터 천 씨 세 가구가 움막을 치고 부족 사회와 같은 원시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가 자주 침략하여 급기야 운봉과 인월에 근거를 두고 약탈과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조정에서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토벌케 하였다. 당시 이성계 장군은 고승 무학대사를 대동하고 천하 명궁 퉁두란(이두란), 변안렬 등 무장들과 1,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을 통과할 때 고남산에서 3일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양지마을 남원 제일 십승지     ©새만금일보

 
  이성계가 고남산에서 3일 기도를 드린 후 왜구를 물리치고 제왕이 되었기에 고남산을 제왕봉이라 불렀으며 제왕봉의 정기를 받아 마을이 부촌을 이루고 도적이나 재앙이 없이 대대로 태평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여원리, 장치리, 연동리 일부가 병합되어 장교리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 여원이 있던 연재는 30여 년 전만 하여도 남원시장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의 휴식처인 주막이 있었던 마을로 하루 종일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연동마을은 연꽃형국의 길지라서 연골, 연동 또는 삼막, 산막이라 하였다. 1400년경 홍정승이 전국을 유람하다 여원재 아흔 아홉 고개를 구비구비 돌아 고갯마루 여원에 이르러 말을 풀밭에 놀게 하고 잠시 휴식을 하였다. 다시 행차를 수습하는데 풀을 뜯던 말이 온데간데없으므로 수행원들이 말의 발자국을 따라 갔더니 연동리의 따뜻한 양지 바른 곳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홍정승은 이곳이 길지임을 깨닫고 남양 홍 씨 자손을 연동리로 이주시켰다. 이후 홍 씨 가문이 번성하여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홍 씨는 모두 이주하고, 1730년경 전주 이 씨와 김해 김 씨가 장교리에서 분가해 와 다시 마을을 형성하였다. 홍 씨들이 3대에 걸쳐 막을 치고 살았다 하여 ‘삼막’이라 하였으며 ‘산막’이라고도 하였다. 마을 뒤 노루봉과 마을 앞 연못의 연꽃이 유달리 아름다워 속칭 연골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마을 이름으로 되었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연동이 되었다.

 

▲남원 제일 십승지 양지마을     ©새만금일보

 

<문화유적과 명소>
[합민성合民城/장교리산성]
 삼국시대의 성터로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운봉면 장교리에 있고 합민성(合民城)이라 하고 석축 둘레는 200간이며,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운봉고원의 서변을 감싸고 있는 운봉읍 장교리 북서쪽 595m의 산 정상부에 있다. 남원·함양간 도로상의 여원치 북쪽 약 2㎞ 지점에 위치한다. 북으로는 고남산, 남으로는 고리봉에 이르는 운봉고원의 서곽을 이루는 요충에 자리한다. 산 능선에는 고남산성, 준향산성· 노치산성 등이 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긴 제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과 북쪽 두 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320m 정도의 성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높이는 4m 정도다. 축성은 판상 할석을 지그재그식으로 쌓았으며, 내탁법으로 축조하였다. 삼국시대의 기와편과 기벽이 두꺼운 문살무늬와 삿무늬가 타날된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장교서 본 장봉     ©새만금일보

 

 <산행안내>
  o 1코스 : 여원재-장봉-방아산(방아산성)-고남산-통안재-매요마을(10km, 4시간 30분)
  o 2코스 : 권포리-고남산-방어산-장봉-주지봉-수정봉-덕운봉-가재마을(14.6km, 6시간)
<교통안내>
o 호남고속도로 오수나들목(19번 국도)-남원(24번 국도)-여원치-운봉 매요리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 나들목-24번 국도-여원치-60번 도로-가재마을(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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