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구룡분맥 남원 이백 석구지石邱地(솔정자, 괘궁송, 586.2m)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7/23 [15:40]

백두대간, 구룡분맥 남원 이백 석구지石邱地(솔정자, 괘궁송, 586.2m)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7/23 [15:40]

▲ 석구지 서쪽 해맞이장소서 본 주천과 견두지맥.     © 새만금일보

 
<개요와 자연경관>
  석구지는 솔정자(괘궁송, 괘궁정) 위에 있는 산봉우리다. 임진왜란 때 조경남 의병장이 의병들과 훈련을 하면서 돌을 쌓아 언덕과 석굴을 만들어 군막과 마구간으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한국 지명 총람>>과 조영진 의충사 종중대표와 노종환 씨의 고증에 의하면 “석구지石邱地는 분무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솔정자(괘궁송掛弓松, 괘궁정掛弓亭)은 대촌 동북쪽 고개 밑에 있는 소나무 정자”라고 한다. <전라북도 전도>에는 솔정자 위에 있는 봉우리에 솔정자봉으로 표기해 놓았다.

 

▲ 석구지 서쪽 해맞이 장소.     © 새만금일보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에는 솔정자의 지명과 산 이름은 없고 산의 높이(586.2m)만 나와 있다. 산악인들은 석구지를 <전라북도 전도>에 표기된 솔정자봉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지도에 표기된 구룡치도 구등치九等峙라고 불러야한다. 그런데 남원시에서 지리산 둘레 길을 조성하면서 구룡치로 잘못 표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석구지 아래 솔정자 숨터.     © 새만금일보

 
  솔정자는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는 길로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가거나 주민들이 남원장을 오가던 길이다. 개미정지, 솔정자는 조경남 의병장군의 전설이 서린 곳이자 장꾼들의 쉄 터였다. 지금은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에서 운봉읍을 잇는 지리산둘레길 1구간이다. 

 

▲ 궁장현 주변 지형도.  © 새만금일보


  궁장현 전승탑의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궁장현은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 때 보절면 출신 강덕복이 족당과 가동家? 수 백 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절하자 부인 양 씨도 남편을 따라서 자결하였다. 이백면 초동의 선영에 장사지냈는데 후일 그 골짜기를 궁장동이라 했다고 한다. 의병장 조경남이 활을 감춰 둔 곳이라 해서 궁장동으로 부른다는 설도 있다. [불우치 또는 부처 모퉁이]는 지금은 남원과 주천 간 4차선 도로 확장으로 옮겨졌지만 옛날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바위를 감고 도로가 나있다.

▲ 궁장현 전적비.     © 새만금일보

 
 [활개미 또는 할개미]는 궁장현에서 이백면 초촌리 초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일컫는다. 풍수지리상 이 부근의 지형을 호랑이가 엎드려있는 복호伏虎형국이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부처 모퉁이에 있는 개를 잡아 먹으려 할 때 맞은편 궁장현에서 사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호랑이가 엎드리다 장수가 호랑이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는 하여 활개미라고 부른다. 이 마을 이름도 호곡虎谷이다.      

 

▲ 석구지 아래 이정표.     © 새만금일보

 
 <<남원의 마을유래>>에는 “황진黃進, 양한규梁漢奎, 조경남 장군을 남원의 삼웅三雄으로 일컫는다. 조경남이 남긴 난중잡록亂中雜錄은 13세부터 53여년을 써 온 일기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정황 등을 기록한 중요한 역사자료다.”는 기록이 보인다.

 

▲ 석구지 아래 지리산 둘레길과 구룡분맥 갈림길.     © 새만금일보

 

 <산경山經과 수경水經>   
  1769년경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우리 전통지리서인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도 고찰해 본 석구지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렇다.
  백두산 백두봉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전북 무주 덕유산 , 무룡산, 장수 남덕유산, 영취산, 백운산, 월경산을 지나 남원 땅의 백두대간 시작점과 연비지맥 분기점인 삼계봉에 닿는다.
  삼계봉에서 백두대간은 동쪽으로 연비지맥을 나뉘고 봉화산, 투구봉, 매봉, 아막성산, 청계산, 시리봉, 산불산, 무덤산, 고남산, 수정봉을 지나 덕음봉(움막)에 닿는다. 덕음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구룡분맥은 구룡폭포 위에 있는 구룡봉을 지나 석구지를 일으키고 장백산, 용담봉, 솟구리봉, 광암봉 등을 형성한다.
  석구지의 물줄기는 요천으로 흘러든다. 솔정자봉의 행정구역은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와 주촌면 호기리의 경계를 이룬다.
 

▲ 석구지 오름길.     © 새만금일보

 
 <지리적 위치>    
 지리적으로 석구지의 북쪽은 백두대간의 고남산, 동쪽은 구룡봉 너머 덕운봉과 수정봉이 지켜준다. 동남쪽은 만복대와 정령치, 남쪽은 구수봉과 영제봉이 에워싸고 있다. 서쪽은 장백산이 지척이다.

 

▲ 개미정지.     © 새만금일보

 

 <주변문화와 인문지리>
 <<한국 지명 총람>>, <<남원의 마을유래>> 등으로 살펴본 석구지의 주변문화와 인문지리는 이렇다.
  석구지 산자락에 있는 주천면 호경리는 지리산의 육모정과 구룡계곡의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좋은 곳이라 하여 호정리의 호수 호湖, 빛 경景을 쓰는 호경리다. 원래 이름은 지리산 속에 있다하여 내촌이었다.
 1680년(숙종 6) 경주 정 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뒤 연안 김 씨와 풍천 노 씨, 밀양 박 씨 등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래 남원군 하원천면 내촌리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촌리·호정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호경리라 하여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와 남원군이 통폐합함에 따라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가 되었다.
 

▲ 석구지의 필자(솔정자봉).     © 새만금일보

 
 <문화유적과 명소>
[조경남 의병장]
 조경남은 조선 중기 전북 남원 출신의 무인이자 의병장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유격장으로 활약하였다. 동지 정사달 등을 규합하여 십여 차례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조경남은 명나라 장수 양원을 찾아가 교룡산성의 수비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성을 막을 대책을 말하였으나 양원은 이를 듣지 않았고,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 뒤 조경남은 동지들과 더불어 불우치에 병사를 매복하는 계책을 쓰며 적과 접전 끝에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어 궁장현에 이르러 김완, 박언량 등과 적을 대파하였다.
 그리고 산동원까지 적을 추격하여 왜군의 군막을 공격하여 도주하는 적병 200여 명을 베었다. 1598년 병사 이광익의 막하로 종군하였는데 이 때 명나라의 도독 유정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 저서로는 <<산서잡록山西雜錄>> 8권이 있다.

 

▲ 지리산둘레길 주천4.1km 지점 이정표.     © 새만금일보

 

<산행안내>
o 1코스: 노치마을-덕운봉(남쪽)-구룡봉-석구지(솔정자)-외송(17번 도로)(6.8km, 4시간)

<교통안내>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고죽교차로(19번 국도)-육모정교차로(60번 도로)-주천-고기삼거리-노치마을
 o 남원-고죽교차로(19번 국도)척문리(15번 도로)-채곡삼거리(17번 도로)외송-원천소교(60번 도로)-고기삼거리-노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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