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의 단심가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3/12/15 [13:32]

정몽주의 단심가

새만금일보 | 입력 : 2023/12/15 [13:32]

 

정몽주의 단심가 충신의 대명사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1337년12월22일 외가인 경북 영천군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이다 . 그의 자는 달가達可요, 호는 포은圃隱이다. 그를 낳을 때 모친의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떨구는 꿈을 꾸어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포은이 9세 때 검은 용이 나무에 오르는 꿈을 꾸어 몽룡夢龍이라 고쳐 불렀는데,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 몽주夢周라고 개명을 했다. 정몽주는 9세 때 하인 여자가 남편에게 편지글을 요청했는데 다음과 같은 편지 를 써주었다.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 차고 이지러지며 바뀌나 저의 마음은 변하지 않 습니다>라고 써 주었는데 하녀가 너무 짧다고 하여 <봉함했다가 다시 열어 한 마디 더하니 세상에 병 많은데 이것이 상사병인가 하옵니다.-相思曲=雲聚散月盈虧 妾心不移 緘了却開添 語世間多病是相思> 어린 몽주의 뛰어난 상상력과 문장력이 돋보인다. 포은은 모친상 때 3년을 시묘하여 공민왕은 효자비를 세우게 했고, 21세 때 감시監試에 3등 으로 합격했다. 24세 때 공민왕 9년에 실시한 과거 시험 삼장三場에 잇달아 장원급제하여 명 성을 떨치며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포은의 가세는 중인 정도였는데 그의 선조 정습명鄭襲明 은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주지사를 지냈고, 인품과 기개가 출중하여 왕에게 직언을 하여 인종 왕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겨 태자의 스승이 되게 했다. 그러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병중 에 음독 자결을 하였다. 간신배에 놀아난 의종왕은 정습명 사후 크게 뉘우쳤다고 한다. 정몽 주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나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 은 福州(지금의 안동)까지 피난할 때 포은은 시종신으로 왕을 잘 보필한 공으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홍건적을 물리친 과거 시험관 김득배가 김용金鏞이란 간신배에게 모해 당해 억울하게 처형당한 사건에 포은은 현실정치에 자괴감을 가졌는데, 왕에게 간청하여 김득배의 시신을 거 두어 장사 지내주고 조문弔文을 지어 조위하는 기개를 보였다. 김득배의 죽음 뒤 포은은 무관 으로 낭장郎將과 문관으로는 선덕랑宣德郎에 올랐으며 종사관이 되어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 신을 따라 여진정벌에 나서 싸웠다. 이때 지은 ‘화주의 밤비和州夜雨’라는 시를 남겼다.< 화주 의 객사 밤새 비가 내렸는데 문밖에는 오히려 조두 소리 들리네 장막안의 장군 불 밝히고 앉 았으니 새벽 오니 백발 더욱 많이 늘었네> 포은이 여진정벌로 화주에 머물 때 비 내리는 전 장터의 살벌함과 나라의 국운과 객수客愁와 향수鄕愁 등 고독한 심경을 잘 나타낸 시라고 보 겠다. 또한 평북 정주의 천리장성과 윤관이 아홉성을 쌓아 수복한 후 오랑캐에게 빼앗겼는데, 성을 되찾기 위해 종군한 포은을 유약한 문관으로만 알고 있었으나 그 시대에 있어 나라가 부 르는 소명에 불타는 용감무쌍한 무관의 진면목을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포은은 남원 운봉의 왜적 토벌 시 이성계를 도와 왜적을 섬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 정벌 때 운명적으로 이성계 (1335-1408)를 만나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포은은 36세 때(공민왕 16년) 예조정랑과 성균 관박사를 제수받아 국학진흥에 심혈을 쏟을 때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된다. 대사성 이색 (李穡1328-1396)과 이숭인, 정도전(1337-1398) 등과 함께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킨다. 이색이 포은을 말하기를 ‘정몽주의 논리는 횡설수설 없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동방 이학의 시조로 추대한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포은은 공민왕 21년 1372년에 국가정책을 담당하였 다. 그 당시 원,명 교체 시기로 국제적인 외교 문제가 중요할 무렵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였을 때 왕과 대신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데 포은이 앞장서 해결하는 외교수완을 펼쳤다. 저 물어가는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자는 청물영원사소(請勿迎元使蔬)를 지었다. 명과 왜의 사신을 모두가 꺼려할 때 포은은 기꺼이 사신으로 가 여러 가지 꼬인 문제를 탁월한 외교술로 해결하는 명 외교관이었다. 포은은 또한 원의 복식을 버리고 관복을 중국식으로 고치게 하는 제도의 개혁을 과감히 시행한다. 그의 성리학풍은 조선조로 이어진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 종직-김굉필-조광조에 이르는 과히 진취적이고 혁명적인 학풍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국운 이 다한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정도전과 달리 교려왕조를 이어가면서 개혁하 자는 포은의 마음을 떠본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단호하게 맞서 포은의 단심가丹心歌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이방원은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포은을 개성 선죽교에서 주살을 하고, 개국공신인 정도전까지 희생의 제물로 삼는다. 돈과 권력에 눈먼 정상모리배 정치는 예나 지 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작금의 비정상적인 검찰 공화국에 국민저항이 드세어 가는데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 마지막 보루인 양심까지 팔며 이합집산離合集散과 변절을 일삼는 철새 정치인들에게 포은의 단심가를 한 번쯤 음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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