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김성수가의 비화(秘話)(13)

레닌이 준 5만 루불의 행적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7/19 [09:36]

인촌김성수가의 비화(秘話)(13)

레닌이 준 5만 루불의 행적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7/19 [09:36]

동아일보 부사장의 직위까지 오른 장덕수는 레닌의 자금수수설에 사회적인 비난을 받았으나 당국의 아무런 제제도 없이 미국유학길에 올라 장장 13년간 미국과 영국을 오가면서 미국의 오리건,컬럼비아 대학과 영국의 런던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부사장대우 보수를 김성수가 보내주었다. 또한 가족까지 수은동에 집을 마련하여 10여 년 간 파격적인 생활비를 인촌이 대주었다. 동아일보사는 해방된 후 58년 만에 그것도 청문회를 열어 그 의혹을 풀려고 했으나 확증을 내 세울 수가 없었다. 일제당국은 박춘금을 단순 폭행사건으로 일축한 검사국 히라야마(平山)검사는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리고 말았다. 박춘금의 권총협박사건을 피해당사자인 김성수나 송진우는 물론이고 경성재판소 검사국도 어물 쩡 넘어 갔는데 사건 개요에 대한 최민지의‘일제하 민족언론사론(p135-136)’에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정치가가 아니요, 일제의 사법관인 이상 조선독립운동을 하든지 일선융회를 힘쓰든지 관계할 바 아니고 다만 법률이 명하는 대로 좇을 뿐이외다. 상애회장 박춘금씨가 4월1일 변호사 유문환씨를 식도원에 불러가지고 발로 차며 중상을 당하게 하고 그 이튿날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씨를 역시 식도원에서 두둘기었으며, 그 날 저녁 다른 방에서 김성수씨를 피스톨로 협박하며 돈을 공갈 하였다는 통문을 들었습니다.(중략) 첫째로 송진우씨로 말하면 박춘금씨가 때린 것은 명백한 사실이외다. 김성수씨로 말하면 외인은 아무도 없고 단 둘이만 이야기를 하였다는데 소문에는 인촌을 피스톨로 협박을 당했다느니 돈 3천원을 박씨가 내라고 공갈하였으니(중략)아시다 시피 법이란 것은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 될 것이어 늘, 이와 같이 증거도 불충분하고 피해자들이 고소도 아니 하는 것인 즉 개인 간의 분쟁으로 보고 구태여 검사가 기소할 필요까지는 없을 줄로 생각하여 수 일전에 불기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레닌자금 사건이 더는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장덕수를 미국에 장기체류하게 한 것이고, 박춘금의 폭력과 협박사건을 인촌과 송진우가 무마한 것도 레닌자금의 행방에 대한 세간의 눈을 돌리기 위한 방법이 아닌 가 의문이 간다. 박춘금의 권총협박은 단순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민족신문 동아일보와 언론에 대한 모독으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 인촌과 송진우와 이사진 전원의 사퇴가 있었고, 편집국에서는 친일성향이 짙은 정치부장 최원순과 경제부장 한기악 등 간부진 전원의 사퇴는 경영진의 친일에 대한 일종의 스트라이크였다. 공백의 사장 직무대리에 감사역 허헌(許憲)이 맡았다. 허헌은 동아일보창간 때 대주주로 감사직을 맡아왔는데 8.15 해방직후에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총장과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인촌은 한 달도 못되어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새로운 간부진을 구성했는데 사장에는 3.1운동 33인 중의 하나요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1864-1930)을 내 세웠으며, 편집국장겸 주필에는 오산학교 교감인 벽초 홍명희를 앉혔다. 이와 같이 평안도 오산학교 팀으로 동아일보를 안정시켜 나갔는데, 불과 5개월 만에 이승훈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인촌이 사장자리에 앉게 된다. 이로써 기자단들의 동아일보 개혁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인촌은 반대세력과의 날카로운 대결을 피해 일보 후퇴하여 기회를 보고 있다가 상대의 예봉이 꺾이는 듯했을 때 야금야금 반격을 하여 목표를 송두리째 점령해 버리는 수법은 김성수만이 즐겨 사용하는 경영전략이다. 김성수의 이러한 경영기법은 그 후의 동아일보 경영에 계속적으로 적용되어왔고 그 후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20년 4월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어 1940년8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간이 되기까지 일제치하에서 20년 간 존속해왔다. 동아일보 사사(社史)는 10여 페이지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박춘금의 권총협박사건은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동아일보를 타도하기 위하여 꾸며낸 흉계인양 장황하게 기술하였으나, 레닌자금 사건에 관여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사내외에서 민족주의 세력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동아일보 개혁운동을 좌익계열의 책동으로 간단하게 몰아 부치고 말았다. 그 당시 레닌의 조선공산당 보조금 200만 루불은 대략 잡아 현재 돈으로 50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김립의 자금횡령 설은 한인사회당 등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이 유포한 뜬소문이라는 설이 있다. 레닌 바람대로 김립과 그의 동지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전달된 200만 루블의 고려공산당 등에 어렵게 운반해 주어 좌파 혁명가들의 사회주의 사업비로 활용되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 지도자들의 손에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어 김립이 암살되면서 나머지 140만 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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